"손으로 직접 그려내는 작업량과 코딩 속도는 AI가 얼마든지 수십 배로 불려준다. 결국 사람에게 남는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내는 안목', 그리고 시스템 전체를 설계하는 구조적 능력이다."
원재호 앵커노드 대표는 지난달 28일 기자와 AI가 바꾸는 게임 개발 현장의 구조와 채용 기준, 그리고 향후 게임 산업의 방향성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원 대표는 넥슨과 네오위즈 등에서 약 26년 간 게임 개발을 직접 맡았던 업계 전문가다. 인공지능(AI) 기술 도입으로 개발자 채용 시장이 위축되고 있다는 시장의 분석이 있었지만, 원 대표의 생각은 달랐다.
원 대표는 기술이 진입 장벽을 낮출 때마다 게임 산업은 지속적으로 성장해 왔으며, 한국 개발자들이 AI 시대에 글로벌 주도권을 잡을 세 번째 기회라고 짚었다.
게임 개발 대중화와 '유튜브 모먼트'
원 대표는 박사급 지식이 필요했던 기계어 코딩에서 상용 엔진, AI 바이브 코딩으로 이어진 개발 진입 장벽의 변화 과정을 방송 산업의 역사에 빗대어 풀었다.
특히 전통적인 개발 방식에서 일정과 비용의 진짜 병목은 개별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아닌, 여러 작업자 간의 화풍과 스타일을 맞추는 조율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이는 앵커노드의 사업 방향으로 자리잡았고, 게임 개발 기반을 단축한 핵심 비결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 원 대표의 설명이었다.
원 대표는 "과거 지상파 3사 독점 시절에는 고가의 송출 장비가 있어야 방송할 수 있었지만, 케이블 시대를 거쳐 인터넷과 유튜브가 열리며 누구나 방송하는 시대가 됐다"라며 "지상파 시절 다루지 못했던 낚시나 바둑 같은 세분화된 취향이 유튜브에서 폭발했듯, 게임 역시 거대 메이저 공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수요를 충족하는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며 시장 규모가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같은 사물을 보고 그려도 사람마다 화풍이 완전히 다르다. 게임 내 수천, 수만 개 에셋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신생 개발사는 많은 리소스를 들여 팀 빌딩을 하고 리테이크를 거친다. 앵커노드는 프로젝트마다 사전 조율된 전용 AI 모델을 먼저 구축하고 에셋을 파생시킨다. 팀의 손기술에 맞춰 스타일을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일을 먼저 정의하고 팀을 꾸리는 구조로 바뀌면서 개발 일정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앵커노드는 수집형 RPG(620일→30일, 20배)에 이어 모바일 도시건설 '스냅타운'의 경우 10인 팀 기준 1년 치 분량을 5명이 6일 만에 완성했다.
세탁기가 바꾼 노동의 형태…'모두가 디렉터'가 되는 조직
원 대표는 AI 기술로 일자리가 줄어든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았다. 1925년 세탁기를 처음 마주했던 여성 메리 리처드슨의 일화를 예로 들었다.
원 대표는 "세탁기가 보급되면서 손빨래 노동은 사라졌지만 가사 노동자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요리나 다림질 같은 다른 업무로 역할이 전환됐다"라며 "게임 개발 현장도 마찬가지다. 단순 반복 노동이 줄어든 대신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다양한 스타일을 실험할 여유가 생겼다"고 말했다.
이러한 변화는 조직 내부의 역할에도 영향을 미쳤다. 과거에는 소수의 아트 디렉터가 실무자의 작업물을 검수했다면, 이제는 모든 작업자가 AI 결과물을 선별하고 최종 품질을 다듬는다고 귀띔했다.
기술 발전 및 효율화로 아낀 시간과 비용은 프로젝트 규모 확장에 재투자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반 제조업과 달리 콘텐츠 산업은 비용 절감이 아닌 완성도와 체급을 키워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앵커노드의 임직원 수는 올해 1월 16명에서 9월 말 30명으로 늘었으며, 채용 인원 중 절반 이상(8명)이 아트 직군이다. 현재 일본 유명 IP 기반의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며, 지난달 열린 도쿄게임쇼(TGS) AI 기술관에 한국 기업으로는 유일하게 단독 부스를 운영하며 기술력을 알렸다.
원 대표는 "예전에는 소수 디렉터 아래 다수의 실무자가 있는 피라미드 구조였다면, 지금은 실무 하단을 AI가 받치고 작업자 개개인이 판단을 내리는 디렉터의 영역으로 올라섰다"라며 기획자가 코드를 분석하고 원화가가 이펙트 툴을 다루는 등 직군 간 경계도 흐려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원 대표는 "콘텐츠는 철저한 상대평가다. 10억짜리 게임을 1억에 싸게 만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 10억으로 100억짜리 규모와 퀄리티를 만들어 경쟁에서 이겨야 시장을 가져간다. AI 시대 콘텐츠 산업의 본질은 비용 절감이 아닌 모험과 확장이다"고 주장했다.
"손기술은 AI가 낸다"…채용 판도 뒤흔든 '안목'
개발 환경 변화는 채용 기준도 바꿨다. 과거에는 수백 명의 포트폴리오를 검토해 뛰어난 드로잉과 코딩 스킬을 지닌 인재를 선별했지만, 현재는 포트폴리오의 완성도 자체를 절대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무엇보다 원 대표는 엔비디아 젠슨 황 CEO의 발언을 인용하며 지능과 기술적 지식이 상품화된 시대일수록 협업 과정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태도와 배려심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원 대표는 "손으로 직접 그려내는 작업 속도와 생산량은 AI가 얼마든지 수십 배로 불려준다. 결국사람에게 남는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려내는 안목이다"라면서 "면접에서는 포트폴리오의 완성도보다 어디까지 AI를 썼고 어디서부터 손을 댔는지, 판단의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과정을 확인한다. 프로그래머 역시 단순 코드 타이핑 속도나 문제 풀이 능력보다 시스템 전체의 구조와 맥락을 명확히 설계하고 조율할 수 있는지를 본다"고 밝혔다.
경력자와 게임업계 지망생 간의 경쟁 구도에 대해서는 "대기업에서 국소적인 업무만 10년 동안 반복 숙련한 인력은 AI 시대에 취약할 수 있다. 반면 AI 툴을 능동적으로 다루며 작은 프로젝트라도 완결 지어 본 신입은 경쟁력을 가진다"라며 "지망생들에게 자격증이나 스펙보다 AI를 활용해 플레이 가능한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플랫폼에 출시하고 유저 반응을 확인하라고 조언하고 있다"고 전했다.
온라인 쇠퇴·모바일 종속 넘은 세 번째 기회…K-게임의 '쇼타임'
원 대표는 한국 게임 산업의 역사를 짚으며 AI 시대가 갖는 전략적인 의미를 강조했다.
원 대표는 "한국은 온라인 게임 시대의 종주국이었지만 기술 습득을 마친 중국의 물량 공세에 밀렸다"며 "모바일 시대에는 글로벌 플랫폼 생태계에 종속된 소작농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AI 시대라는 새로운 판은 아직 승자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뉴주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게임 시장은 약 280조원 규모로 연평균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자본력과 인력 규모보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기획력이 주목받고 있다.
원 대표는 인터뷰 말미에 "르네상스는 다양성에서 나온다. 개발비 부담 때문에 나오지 못했던 기획, 혼자서는 제작할 수 없었던 아이디어 게임들이 시장에 등장할 것이다. 한국은 온라인 게임의 부분유료화 모델 등 세계 게임 시장의 룰을 직접 만들어 본 경험이 있다"라며 "앞선 두 번의 시기를 지나 마주한 세 번째 기회는 잡아야 한다. AI 도구를 자체적인 무기로 다듬어 글로벌 시장에 도전한다면 지금이 한국 개발자들의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